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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의무경찰, 2008~2010

명동성당, 용산참사,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

by hyperblue 2009. 10. 29.

※ 사진 클릭하시면 좀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2009년 10월 29일) 명동대성당에는 많은 전의경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천주교 신자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세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 700여명의 서울청, 기동본부, 경찰서 소속 전의경이 새신자로서, 그들의 첫걸음을 축복해주는 대부(代父, godfather)로서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줄줄이 모여들었다.

우리 중대에서는 애석하게도 새신자가 한명이었다. 그리고 대부를 서는 나와 함께 이 곳까지 인도해주신 담당 선교사님까지 총 3명만이 참석. 다른 중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동대 같은 경우에는 중대당 수십명이 우르르 와있었다. 신자 입장에서는 참 부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소수만 참석한 우리 중대가 좀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래도 종교활동에 대해 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우리중대 지휘부의 모습이 이런 씁쓸한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

내 생각에, 군인에게 있어서 종교란 마음의 쉼터 같은 것이다. 숱한 선임들의 갈굼과 벅찬 근무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앙뿐. 보지 않아도 항상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는 '신'은, 오래 사귀었어도 만날 수 없는 '여자친구' 같은 존재와는 비견할 것이 못된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군에서는 보통 '1인 1종교갖기'를 장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엄밀히 말하면 국방부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군인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군의 정책에 따른 혜택을 바로바로 보지 못하는 전경, 의경들. 특히, 서울에서 근무하는 이런 자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주는 단체 중의 하나가 바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경찰사목위원회이다. 앗, 말이 좀 새기 시작했다. 다시 원 포인트로-

난 아주 어릴적에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닌(객관적으로 말해 그리 독실하다곤 못하겠지만), 가톨릭신자임이 자랑스러운 사람 중 하나였지만, 정작 한국 천주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명동성당은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의 대부로서 새신자의 첫걸음을 축복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곳에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다니... 요즘 군대는 확실히 '많이 좋아졌다'.

유럽에서 본 장엄한 성당건물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쏟아지는 따사로운 태양빛이 절로 날 고개 숙이게 만들었다. 내가 왜 이 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으며, 왜 이 나라의 군인으로서, 경찰로서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순간이었다.

길고긴 미사와 세례예식을 통해 수 많은 대한의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전역 후에도 신자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성당을 다닐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죽을 때까지 이 거룩하고도 신성한 예식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는 없으리라ㅡ

난 입대전에 의경에 대한 자체조사(?)를 끝낸 후, 그 전까지 유지해온 종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내렸었다. '주5일제'적용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주말 휴무가 보장되는 국방부 소속 군대와 달리, 전의경은 딱히 정해진 휴일없이 그날그날의 치안수요에 따라 근무가 결정되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대전입후 알게 된 경찰서 내 '경신실'. 천주교 종교활동을 위한 공간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군에서 맞는 '제2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다. 힘든 막내시절과 여자친구와의 이별, 고참들의 갈굼속에서 내가 기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뿐이었다. 가끔 참석하는 주일미사와 교리시간은 그동안 쌓인 심신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남은 군생활도 정확히 6개월.
아직 한참 남았지만, 그동안 그 숱한 역경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나 싶다. 아마도 고통의 순간순간 의지할 수 있었던 내 신앙, 그리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을까싶다.

용산참사현장인 남일당 빌딩 앞에선 매일 추모미사가 열린다. 나도 자주 가는 근무지인 그곳. 저녁 7시 즈음이면 어김없이 미사가 거행된다. 난 어떻게 보면 철거민들의 적인 '경찰, 전의경'의 편에 서있었지만 옆에서 근무를 서며, 미사현장 옆에서 조용히 함께 기도하곤 했다. 정치적 색깔, 목표, 현재의 처지는 그들과 대척점에 서있을지라도 그들이 은총을 청하는 대상도, 내가 기도하는 대상도 모두 같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대원들은 천주교신자인 내게, '너희 천주교는 원래 저렇게 좌측에 서있느냐, 반정부적이냐'라고 묻곤 하지만 난 그저 '저들은 천주교 내에서도 일부일뿐. 정치적 색깔과 종교는 관계가 없다'며 간단하게 대답해주곤 한다.

지금도 내가 세례미사를 참석한 그 명동성당엔 용산참사 관련 수배자들이 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잡기위해 나와 같은 전의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들이 24시간 빈틈없이 교대근무를 서며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 또한 이들 때문에 군생활의 1/3넘는 기간동안 밤낮으로 '뻗치기'근무를 하며 이를 갈았다. 난 그들이 참 밉다. 그들이 없었다면, 더 근본적으로 용산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근무 중 많은 부분이 없었거나, 혹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산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입구를 들어서며 근무중이던 나에게 생수병을 던지던 문○○ 신부님도, 그분과 같이 미사를 드리며 울분을 토하던 철거민 유족들도 나와 같은 하느님께 기도하며 은총을 구하기에 난 그들을 무작정 미워할 수 없다.

가끔은 참 괴롭다. 무엇이 옳은 것이며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직은 이런 질문에게서 도피하고 싶다.

먼 훗날 전역을 하더라도, 난 계속 도피하고 싶다.

끝으로, 모자란 나의 대자(代子)가 되어 가톨릭 신자로서의 새삶을 시작한 후임대원 이○○(요셉)의 남은 군생활 및 인생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아, 그리고 항상 우리 전의경을 위해 봉사하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경찰사목위원회 소속 선교사님과 여타 도움주시는 많은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을 줄인다. 이 단체가 더 활성화돼서 격무에 지쳐가는 서울의 전의경들에게 최고의 쉼터가 되길 기도해본다.

오늘도 값진 하루를 선물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기도하는 성모상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성당 내부

미사가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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