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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회사원, 2014~

통화스왑 10억불을 찍은 날, 그리고 서울외환시장이 새벽2시까지 열린 날.

by hyperblue 2024. 7. 2.

저번 주 목요일, 아침부터 거의 모든 거래은행에 가격을 tapping하고 네고를 이어간 끝에 통화스왑 10억불어치를 찍었다. 1조원도 넘는 돈인데 돈 만원에도 벌벌 떠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모습이 괜히 어색하다.

내 인생 첫 외환거래는 전 회사에서 했던 7~8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대리를 막 달았을 떄 쯤이었는데 선배의 "네가 알아서 한번 해봐"라는 오더를 받아서 전화로 국민은행에 5백만불을 value today로 sell했던게 기억난다. 이것도 50억원이 넘는 돈이었으니 어안이 벙벙해서 기념(?)으로 은행에서 받은 거래 컨퍼메이션을 사진 찍어서 어딘가에 보관중이다. 1백만불씩 쪼개서 몇시간 동안 틱 차트를 보면서 신중히 팔던 게 엊그제인데 지금은 뭐... 할많하않이다. 이제는 물어볼 사수도, 실수를 하거나 사고가 났을 때 기댈 수 있는 선배도 없다. 내가 바로 그 사수이자 선배이고, 만약에 실무자 선에서 해결이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면 내 위의 책임자 레벨이 다칠 수 있다.

지난 주에 한 대규모 거래의 후속 결제업무 또한 스펙타클하고 고통스러웠다. 늘상 이런 거래들을 하는 은행 혹은 일반 회사에서라면 모든 것들이 스무스하게 처리되겠지만, 장담컨대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딜러는 거래만 하면 땡'이란 식의 교과서적인 마음가짐은 조직에서 곤란하다. 나는 하루종일 차트 보면서 외환거래만 하는 딜러가 아니라 "환리스크 관리"가 내 진짜 직무라고 생각한다. 환리스크 관리에서 외환 딜링은 일부일 뿐이다. 거진 10년을 일반기업의 외환 밥을 먹고 있지만, 조 단위 거래는 그 뒷처리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쨌거나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다. 잘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께는 큰 결제사고가 나는 악몽을 꿨다. 회사일로 악몽을 꾼 건 내 기억이 맞다면 만 10년을 이어온 회사원 삶에서 두세번째이다. 그 정도로 중압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울외환시장이 '오후 3시반 종료' 시대를 마감하고, 어제부터 '익일 새벽 2시 종료' 시대를 열었다. 한참 야근중인데 인포맥스의 USDKRW 스팟시장 틱 차트가 잊을만 하면 한번씩 깜빡대며 움직이고 있다. 어색하고도 묘하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시장참여자 모두가 함께 가고 있고, 내가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시작한 시장참여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뭉클한 부분이 있다. 모 외은에 재직중인 유능한 학교후배의 스팟 코멘트처럼 이번 외환시장 대변혁은 아무도 선뜻 확신을 갖고 그 영향을 재단하기 어려운 '여백'으로 시작했으며, 이 여백은 모든 시장참여자들이 차차 메워갈 것이다.

금융시장은 그 자체로도 역동적이고, 외환시장은 흔히 접하는 주식시장과는 다소 다른 특수한 구조 때문에 더 흥미진진하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는 '시장에서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은 아니지만, 항상 buy와 sell이 부딪치는 그 최전선에서 변화의 물결을 체험하고 때로는 만들 수도 있는 지금의 내 포지션이 너무나 좋다.
혹자는 외환으로, 특히 FX와 관련된 갖가지 주제와 업무들로 점철된 내 커리어를 보고 "기업의 자금담당자"로서 꼬였다고 하지만, 나는 최소한 아직까지는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이 제너럴리스트의 길을 막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24시간 내내 시간대마다 바톤터치를 하며 계속 열려있는 글로벌 외환시장처럼 작금의 나의 각오, 그리고 마음가짐도 계속 빨갛고 파랗게 점멸하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어딘지 모를 종착역으로 흘러가겠거니 자정이 가까워오는 사무실에서 지레짐작해본다.

야근은 이전 회사나 지금 회사나 다를 바 없는 이 업무의 숙명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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